선택의 미학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빚어낸 돌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의 철학이자 예술입니다. 수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자연이 빚은 영원과 인간의 선택이 만나는 순간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빚어낸 돌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의 철학이자 예술입니다. 수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강가에 서면 발밑으로 수만 마리의 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아우성친다. 어떤 것은 억겁의 세월을 견디느라 둥글게 마모되었고, 어떤 것은 이제 막 산의 품을 떠나온 듯 서슬 퍼런 각을 세우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이라 말하지만, 수석(壽石)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그 정의는 뒤집힌다. 여기서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무한 속에서 단 하나를 가려내는 일', 즉 선택에서 시작된다.
허리를 숙여 돌 하나를 집어 든다.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온다. 수천 년, 혹은 수억 년 전 어느 거대한 산맥의 일부였을 이 작은 조각은 물살에 깎이고 바람에 씻기며 여기까지 흘러왔을 것이다. 그 유구한 시간을 나는 단 몇 초의 시선으로 '선택'한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도 경이로운 만남인가.
인류는 태초부터 무언가를 만들어왔다.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고, 바위에 정을 쳐서 신상을 새겼다. 그러나 수석은 인간의 개입을 철저히 거부한다. 칼을 대는 순간 그것은 수석이 아니라 '가공석'이 되어 생명력을 잃는다.
여기서 인류가 발견한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인 '부작위(不作爲)의 미'가 탄생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 역설. 수석인은 조각가가 아니라 큐레이터에 가깝다.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전시장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주파수가 맞는 단 하나의 작품을 찾아내는 탐험가다.
우리가 돌을 선택하는 기준인 형(形), 질(質), 색(色), 문(紋)은 사실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웅장한 산맥을 닮은 경석(景石)을 고르는 이는 가슴 속에 광활한 이상을 품고 있을 것이고, 기묘한 형상의 괴석(怪石)에 마음이 끌리는 이는 삶의 비정형적인 진실을 긍정하는 이일 것이다. 결국 돌을 선택하는 행위는 나를 닮은 자연을 찾는 과정이다.
인류가 수석을 사랑해온 역사는 짧은 인간의 생애가 영원을 갈구해온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작은 돌 하나를 책상 위에 두고 '축경(縮景)'이라 불렀다. 손바닥만 한 돌에서 천 리 밖의 명산을 보고, 억겁의 세월을 보았다.
문명은 늘 빠르게 변한다. 어제의 최첨단이 오늘의 고물이 되는 속도의 시대에서, 돌은 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위로한다. 내가 이 돌을 선택하기 전에도 돌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떠난 뒤에도 돌은 여전할 것이다. 이 '변치 않음'을 선택해 곁에 두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우주와 연결되고자 하는 가장 정적인 몸부림이다.
현대 사회는 '더 많이 가지는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수석의 미학은 '덜어냄'에 있다. 수만 개의 돌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하나를 고르는 행위는 나머지 수만 개를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진정한 선택의 아름다움은 탐석(探石)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방에 든 묵직한 돌 하나에서 느껴진다. 욕심껏 채운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지만, 마음을 비우고 고른 단 하나의 돌은 영혼을 가볍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수석을 통해 배운 '절제의 미'다.
수석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세상의 어떤 웅변보다 강렬하다. 강가에서 집어 든 돌 하나를 정성스레 씻어 좌대 위에 올리는 순간, 그 돌은 비로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우주'가 된다.
인간의 삶 역시 수석을 고르는 과정과 닮아 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인연과 사건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날카로운 상처를 선택해 평생을 아파하고, 어떤 이는 풍파에 깎인 매끄러운 평화를 선택해 내면을 다스린다.
오늘도 나는 강가를 거닐며 마음의 돌을 고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깊이가 있고, 거칠어도 당당한 자연의 일부를 내 삶으로 초대한다. 그 고요한 선택의 순간이야말로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럽고도 경건한 예술의 시간임을 나는 믿는다.